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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말에 갤러리시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Tracing Times”로 지었다. 뉴스미디어로부터 추출한 다양한 그림자를 이용했고,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투영한 그림자들이라는 상상이 바탕이 되었다.
Hug Stencil 허그 스텐실, Memorial Shadows 기념비적 그림자
이 두 시리즈의 작업은 평행세계 설치작업을 위해 평소에 신문 기사를 모으고 신문 기사에서 반복되거나 상징적인 인간상을 분류하고 아카이빙하는 과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신문, 뉴스 미디어에서 포착하는 인간상은 대체로 극적이고 상징적인 경우가 많다. 종종 미술사에 등장하는 예술작품의 한 장면에 등장할 법한 포즈로 촬영된 것을 보게도 되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새삼 눈에 뜨인 것은 많은 장면의 인간상이 동상의 포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Memorial Shadows에서는 그런 실루엣들을 좌대 위에 세워진 동상처럼 기념공원의 나무들을 배경으로 반전된 풍경 이미지로 기념비의 부식 명판 기법을 이용해 제작했다.
Hug Stencil 시리즈는 뉴스 미디어에 등장하는 다양한 포옹의 실루엣을 3차원의 공간에 자취로 남긴다는 생각으로 제작하였다. 뉴스매체에 등장하는 포옹에는 정치가나 각국 정상들의 포옹부터 셀럽들의 포옹, 사건 사고나 자연재해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서로 슬픔을 나누는 위로의 포옹,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라는 선입견을 깨고자 한 퍼포머와 행인과의 신뢰의 포옹, 전쟁의 상처로 자식을 잃은 한 인간의 피에타 같은 슬픔의 포옹 등등 세계 곳곳의 동시대인이 겪고 있는 현대사를 반영하는 그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다양한 포옹을 보면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티브로 삼았던 작품 속에서의 포옹들이 떠올랐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에 선사 인들이 손바닥을 남긴것을 Hand stencil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는 Hug Stencil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Overlapped Times 중첩된 시간
대한민국 곳곳에 세워져 있는 동상을 모아 놓고 보면 우리의 역사가 한 눈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기념공원에 조성된 나무들과 중첩된 그림자로, 연결된 하나의 그림자 덩어리로 상상해보았다. 왼쪽부터 이병철, 강감찬, 이봉창, 김주열, 최규식, 정몽주, 윤봉길의 동상이다. 철판을 레이져커팅하고 분체도장으로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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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ghwado_Shadow across Time 강화도
올해가 3.1운동 및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 이다 보니 텔레비젼 드라마, 연극영화를 비롯한 뉴스까지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생각, 구한말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들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 땅에 낯선 서양의 함선에 등장한 시간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전시 준비 단계에 문득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화도 곳곳에 위치한 역사박물관과 유적지에는 조선 말기에 등장한 서구와의 전투에 대한 유물과 기록이 잘 전시되어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때와 다름없이 일렁이고 있는 바다의 물결이 가장 실감 나게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게 해 주었다. 강화도의 소나무 사이로 바다를 바라보다가 서구의 이양선이라는 것이 처음 조선 땅에 등장했을 때를 상상했다. 섬 주위를 걷던 어느 한 조선인이 소나무 사이로 바다 위에 떠 있는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이양선을 발견한 그 순간의 시선을. 서양의 기술과 미감에 의해 만들어진 이양선의 실루엣과 조선 땅의 소나무 실루엣이 겹치는 순간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 시간 이후로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고 조선의 궁에서는 커피 향이 나기 시작했고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되어간 역사의 순간순간들,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서…
History of Liberty 자유의 역사
강화도 답사 이후에 서울 곳곳에 위치한 동상들을 찾아다녔다. 실제 동상과 기념공원, 기념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인터넷 서치를 통해 찾아보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동상에 대한 서적을 구해 읽기도 했다. 동상은 각 시대가 기념하고자 하는 인간상의 물화된 모습인데, 건립되는 동상은 각 시대마다 자유 Liberty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각 시대의 시스템이 어떤 자유를 제시하고 사회가 합의하는지를 반영하는 자유의 역사라고 여겨졌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의 자유(사명대사 동상), 식민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유관순 동상),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맥아더 동상), 독재 권력으로부터의 자유(김주열 동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의 자유(이병철 동상)로 이 시리즈는 일단락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모두 같은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떤 자유를 추구하게 될지 한 번 생각해 본다.
Underwood 언더우드
동상을 찾아다니다가 연세대 본관에 있는 언더우드라는 인물의 동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동상은 1928년 처음 세워져 지금까지 두 차례 파손이 되었고 현재의 동상은 세 번째 동상이라고 한다. 동상의 주인공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로 선교사로 조선에 온 뒤 서양식 의료기관에서 물리학을 가르쳤고 기독청년회 YMCA를 조직했으며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을 설립했다고 한다. 이 동상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무기를 만들 동이 부족하다며 떼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 땅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지고 그것이 어느 시점에 전쟁 무기의 재료로 이용된 것은 근대화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를 통해 서양의 지식과 기술, 문화가 전파되었지만 동시에 근대화는 침략전쟁이라는 얼굴로도 이 땅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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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a Morgana 신기루
작업에 필요한 보도사진을 수집하느라 신문을 넘기던 2018년 어느 날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러시아의 함대 돈스코이호에 관한 광고가 신문 지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것을 보게 되었다. 모 그룹은 이 선체에 엄청난 금(金)이 함께 침몰하여 있고 그 선체를 인양하는 모금을 가상화폐의 형식으로 모으고 그 수익금을 나누겠다고 발표했다. 2018년에 보물선이라니… 2018년 가상화폐의 광풍과 함께 대한민국 사회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진 보물선이라는 환상을 금빛 일루젼으로 표현해보았다.
Shadow of Shadow 그림자의 그림자
이 작품은 남산 공원에 건립된 김구 동상의 실루엣을 본따 만들었다. 유신정권 하에 민족의 정기를 북돋운다는 취지로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많이 건립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식민정책에 우호적이었던 예술가가 그 제작을 도맡게 된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양미술 교육을 받은 예술가는 대부분 일본에서 유학했으므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동상도 그중 하나이다. 이 동상은 그런 연유로 철거 논란도 있었고 그런 사실 자체가 모순과 아이러니가 뒤섞여 있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반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빈티지 물건을 좋아하는데 한번은 어렸을 때 사용하던 대나무 자를 빈티지로 구하고 싶어 수소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이 대나무 자의 원형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과거의 시간이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을 깨달은 기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일본 경매 사이트에서 빈티지 대나무 자를 구매하여 남산공원의 김구 동상 실루엣 모양으로 한 줄 한 줄 잘라 붙여 조각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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