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원, 사라지는 실루엣에 드러난 이미지의 정치학, 2010

월간퍼블릭아트, 2010, 5월호 기사, 서정임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국가적, 지역적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는 작금의 환경에서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거나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작업하는 예술가들, 특히 젊은 예술가들은 그 나라가 가진 문화사회적 구조와 가치, 정치권력 등을 접하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응과 거부 사이에서 절충된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에 이입시키곤 한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이창원 역시 그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상이한 두 장소에서 동양인과 유럽인의 문화/사고 의 차이와 의외의 유사성을 체험하며 대중미디어에 의해 특정 이미지가 소비되어 가는 과정을 찻잎, 커피와 같은 식재료, 인쇄물, 거울을 이용한 반사광(reflection) 설치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멀리서 볼 땐 특정 초상의 실루엣이 읽혀지지만 가까이 갈수록 형태가 사라지며 작품이 만들어진 구조 를 드러내는 이창원의 작업은 독일 유학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초기 유럽에서 생활하며 겪은 개인적이고 사변적인 소재들, 즉 동서양의 음식문화의 차이점을 관찰하며 차, 커피, 과일, 소시지와 같은 음식 재료들로 여러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작가는 인터넷과 광고,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짧은 수명을 가진, 그렇기에 더욱 더 자극적이어야만 하는 이미지들, 강렬한 이 미지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사람들, 이에 따라 망각이 가속화되는 아이러니에 주목하였고, 정치 사회적 사건과 연관된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기법을 위한 기법이 아닌 의미를 지니는 표현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때문에 커피나 찻잎 가루로 구성된 실루엣이라든가 반사광으로 이루어진 흐릿한 초상 이미지 등, 현재 그가 제시하는 표현 언어는 이때의 실험과 작업을 기저로 구축된 것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특히 전시장 벽에 블라인드와 같은 횡적 구조물을 설치하고 커피와 찻잎 가루, 홍화 잎 등 자연 재료를 한칸 한칸 쌓아 전체 형태를 만드는 작품은 대중미디어에서 가져온 이미지의 실루엣을 조합해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구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Shadows of Heroes, 2008>와 같이 최근 국내에 주로 선보인 찻잎 설치물은 거대하게 제작된 동상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으로써, 작가는 동상이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사회의 담론에 따라 쉽게 철거되거나 논란에 휩싸이는 순간, 더 이상 영속성도 권력도 지니지 못한 대상이 되어버리는 시대의 변덕에 집중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지난해 USB전을 통해 소개된 “남산의 하루”는 커피가루를 쌓아 만든 것으로써, 독재정권 시대에 민족정기를 되살린다는 취지로 세워진 동상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친일파 논란에 있는 작가들에 의해 제작되어 결국 철거되었다는 보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커피는 이러한 테마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료였는데, 커피는 일상 속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소비되는 기호식품인 반면, 그 이면에 거대 기업의 자본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식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말라가며 향기를 잃어가는 커피와 찻잎의 재료적 속성은 우리의 기억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일련의 사건들을 암시로써 활용되었고, 블라인드 구조는 재료를 쌓기 위한 기능적 측면 외에 전체적인 이미지를 해체하고 우리의 시지각을 통해 이미지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유의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는 우연히 각 선반 사이에서 재료가 벽면에 투사하는 반사광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사진작업이 아닌, 조각적인 재료로서 사진을 다루는 리플렉션’ 작업이었다. 이 방식은 다양한 인쇄물 조각을 칸칸의 구조물에 부착해 그 표면으로부터 특정 인물의 이미지를 벽면에 반사시키는 것으로서, 파편화된 이미지가 반사광으로 다시 조합되어 재료 자체의 물성을 넘어 환영과 같은 흐릿한 이미지로 완성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1967년 유신정권 하에서 한독관계를 악화시켰던 동백림사건을 참조한 <People of the Trial>작업으로, 조명을 통해 유리 위에 네거티브로 그려진 인물들의 이미지를 전시장 벽에 흐릿한 포지티브 이미지로 투영시켰다. 작가는 이로써 권력과 매체에 의해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이미지와, 시간과 조건, 해석의 여하에 따라 그것이 어떻게 인식되는지, 이를 바라보는 과거의 희미한 기억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2 Nelson Mandelas> 역시 만델라 대통령이 테러리스트로 인식되던 시기의 초상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이후 영웅이 된 모습을 한 화면에 등등하게 배치한 작품이다.

최근 작가는 유리나 거울을 이용해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반전으로, 개인의 초상이 사진으로 유포되는 방법에 따라 그 의미와 맥락이 사회정치학적으로 어떻게 재해석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2009년에 열린 개인전 <Disappear>에서 그는 매체를 통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성향이 미지의 정치학으로 대중에게 인식된 초상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권력에 의해 간첩으로 인식되거나 반테러리즘 정책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오인되었던 사람들로, 거울에 그들의 이미지를 흰색 네거티브로 표현해 관객의 위치에 따라 네거티브 혹은 포지티브 이미지로 보이게 함으로써 미디어에 노출된 일련의 피해자들의 초상이 인식되고 범주화되는 방식을 가시화했다.

이처럼 조명, 반사를 통해 발생하는 시각적 전이의 과정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서 관객의 위치와 지각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불완전한 상태의 설치작품은 흐릿해지는 기억처럼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전체 이미지로, 혹은 가루와 같은 입자로, 아니면 눈으로 쉽게 인지하기 힘든 흐릿한 반사광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보고 인식한다는 것,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어떻게 뇌가 처리하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세상을 각기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예술이라 여기는 작가 이창원 조각과 사진, 회화를 넘나드는 매체와 기법, 언어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하지만 특정 경계 안에 머물거나, 아니면 그 경계를 없애려 시도하지 않는 그는 앞으로 대중매체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이미지와 정보가 어떻게 다른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게 하는가를 보여주며, 현실과 역사를 비춰볼 수 있는 작업을 선보일 계획이다.


작가 이창원 1972년생으로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Münster Kunst Akademie)에서 아카데미 브리프 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 벨기에 설치작가 기욤 바일(Guillaume Bijl)에게 사사받았고, 기욤 바일은 많은 대가들의 작품세계를 보더라도 자기 작업으로 돌아와서는 그걸 잊어버리고 작업하라 주문하며, 이창원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작업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5회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2006년 DAAD 우수 외국인 학생상을 비롯해 “Shared. Divided. United”, “재외한국청년미술제 U.S.B”, “씨티넷아시아 2009”. “반응하는 눈: 디지털 스펙트럼”, “Art Through Nature”, “Soft Power” 등 기획전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