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용(서울대학교 교수. 미술사학 박사)
이 세계는 우리에게 원형이 아니라 반영을 보여준다. 원형 부재의 이미지가 아니다. 원형은 반영의 바로 아래. 일정한 간격으로 돌출된 선반 위에 있다. 차, 커피, 옥수수 전분 등의 물성(物性)을 지닌 원형에 빛에 반사되면서 그 흐릿한 반영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형태와 색채가 아니라, 빛으로 산화된 그것의 잔영(殘影)이다. 이 세계는 매체론과 이미지 미학, 그리고 20세기 전위미술사의 세 측면에서 각각 주목할만하다.
실재와 이미지, 탈-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적 복원
첫째, 원형의 존재와 그 상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원형은 부재하거나 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원형과 반영, 실재와 이미지는 물리적으로 서로 결부되어 있다. 이미지는 실체 없는 관념이나 추상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이로 인해 피사체와 이미지의 물리적 분리에 기인하는 카메라 사진의 결정적인 딜레마, 곧 페이크(Fake), 속임수나 위장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진다. 그만큼, 진실과 사실성이 담보된다. 매체론적으로, 이 세계가 독창적이고 참신한 이유다. 이에 더해 하나의 실재에 하나의 이미지, 즉 실재와 이미지의 일대일 대응이고 복제 불가능성이다. 이 점이 이창원의 이미지가 사진을 비롯한 이후의 디지털 매체들과 특성적으로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이다.
원형은 반영의 바로 아래에, 종종 바람이 불면 없어지는 매우 취약한 방식으로 실존한다. 정확히 하자면 그것조차 실재의 재현 이미지다. 실재가 물리적으로 재현되고, 재현과 재현된 이미지의 비물질적으로 매개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실재와 매체와 이미지가 서로 적대적이거나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의 관계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적이지 않다. 여기서 부친 살해와 보복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의 모방, 곧 사랑의 관계다.
저해상도 이미지의 미학
둘째, 반영의 낮은 해상도에 관한 것이다. 반영의 해상도는 빛의 각도나 세기에 따라 조금씩 달리할 수 있다. 반영은 원형을 비물질적으로 재현하지만, 세부와 구체성은 필연적으로 누락된다. 실재-이미지의 엔트로피 법칙에 의한 해상도의 불가피한 삭감이다. 그로 인해 원형의 해상도는 크게 낮아진 상태지만, 원에 대한 시각적인 유추는 충분히 가능하다. 다가서서 원형을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해상도의 이 삭감은 신성에서 인간성, 인간성에서 비인간성, 예컨대 짐승이나 인공지능으로의 이전에서 나타나는 점진적인 신성(神性)의 휘발, 숭고의 고갈의 상징적 비유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대는 실체와 이미지의 분리와 이미지의 무한 복제에 기반하는 시대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바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시대다. 이미지가 실재의 부재를 은폐하는 것을 넘어 억압하는, 거짓 기호와 의사 실재가 만연한 시대다. 이를 위해 이미지는 실재를 은폐거나 능가하는 기술인 고해상도가 선(善)으로 간주되는 반면, 낮은 해상도는 용납할 수 없는 악(惡)으로 저주되었다. 이미지의 고해상도는 실재의 소멸 값인 것이다.
반면 이창원은 흐릿한 반영을 고집한다. 매체론적으로 원형을 넘어서거나 버금가는 해상도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류인가? 아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를 욕망하지 않기의 어엿한 기호이다. 실재의 자리를 넘보지 않기,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로 환원되지 않기의 시각적 기호다. 낮은 해상도가 오히려 미(美)의 정수로의 안내자다. 흐릿함을 못 견뎌 하는, 규정하기를 즐기는 오만한 이성을 단죄하기다. 대전 이후 해체주의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이 이성적 시각의 족쇄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써왔던가를, 예컨대 마크 로스코 (Mark Rothko)나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를 떠올려 보라.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임상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에 의하면 인간은 ‘저해상도로 창조된 신, 곧 신성이 없는 신’이다. 저해상도는 결핍된 신성의 시각적이고 메타포릭한(Metaphoric) 번역이다. 그 안에서 그 시각적 저해상도는 신성의 부재를 앓는 존재성에 대한 성찰과 회복, 저주받은 개체성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우주적 보편성과 연대하기의 열망으로 나아가는 관문이 된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베유(Simone Weil)는 아름다움을 우주적 보편성 자체 또는 그것의 중요한 특성으로 정의한다.
사실, 재현, 반영의 융합
이창원의 반영은 원형을, 그 원형은 역사적 순간들과 재현적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역사는 구체성과 시각적 해상도를 잃지만, 그 보상으로 해석적 개방과 예술적 상상력을 얻는다. 이 상실과 회복의 이중 나선구조가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담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몇 개의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사례 1. <A day in Namsan>, 2009.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다수의 동상이 세워졌다. <A day in Namsan>은 그 중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서 있는 광경이다. 커피 가루로 만든 원형의 반영으로서 실루엣이다. 모두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동상 제작자는 친일행각으로 알려진 조각가다. 두 동상이 철거 논쟁에 휩싸였던 이유다. 두 독립운동가의 기억과 기억의 왜곡이 중첩된다. 인물의 구체성이 누락된 자리에, 윤곽만 남은 역사의식, 평면화된 회색의 기억만 남아 있다.
사례 2. 2014년 작 〈Angel of the Mirror>(2014). 2013년 전두환 일가의 미술 소장품이 경매에 올라왔다. 뉴스는 연일 전두환 일가의 미술을 대하는 높은 안목 운운에 여념이 없다. ‘미적 안목’이 과연 실체가 있는 개념인가? 그 안에 ‘광주’를 허용하는 어떤 억압적 성향을 내포해도 그만인 것인가? 독재와 구조적으로 관련되는가? 이현령비현령인가? 이창원은 천사가 보석 장식된 거울을 들고 있는 전씨 일가의 한 소장품에 착안해, 그 거울이 광주의 기억을 반사하도록 장치한다. 우리가 안목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근거 없는 가설과 비약, 임의성이나 과장, 그리고 비굴한 아첨이 섞이곤 하는지!
사례 3. 〈Shadow Casters>.2014. 보는 것, 곧 시각에 대한 의구심이다. 정면에서 보면 영락없이 빛으로 재해석된 몽드리앙(Piet Mondrian)의 신조형주의 회화의 형식적 응용이나 확장으로 보인다. 신조형주의는 ‘존재 내의 보편적인 진리와 교감할 수 있는 정신적인 미술’의 시도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빛-회화의 실체는 대량생산된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제품들이다. 우리의 시각은 거짓에 취약하다.
융합, 이창원의 미학 레시피
이창원은 20세기 서구미학의 시원(始元)이, 예컨대 마르셀 뒤샹의 레이 메이드가 폐하고자 했던 것들을 포괄적으로 복원한다. 보라. 실재와 빛과 이미지의 공존이 있고, 이미지는 실체 없는 환상의 산물이거나 시뮬라크르가 아니다. 매체에 대한 고금을 오가는 인식이 있고, 사실의 정신과 재현 미학이 여전히 건재하다. 레디 메이드의 신화, 작가의 선택 이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선택마저 임의적이었던 미학의 발전적 복원이다. 신체 노동과 기술이 복원되고, 미니멀리즘이 추방했던 공동체의 기억까지 소환한다.
20세기 서구미학이 내려놓았던 것들이 갈등 없이 공존하고, 발화의 기회를 동등하게 누린다. 이창원의 아날로그적 세계에서 백남준이 한때 거론했던 비빔밥의 레시피, 융합하고 포용하는 미학의 융기를 마주하게 된다.
Changwon Lee’s Aesthetic Recipe: Post-Oedipal Complex, Row-Resolution, and Fusion (Restoration)
Sangyong Shim (Professo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Ph.D., Art History)
This world shows us not the original but its reflection. The original is right below its reflection on the panels that protrude at regular intervals. The light reflects off the originals with materiality, such as that of tea, coffee, and cornstarch, leaving blurry reflections of them. What viewers encounter is not form and color but its afterimage that has evaporated into light. This world is remarkable equally in three aspects: media theory, image aesthetics, and 20th-century avant-garde art history.
Reality and Image, the Post-Oedipal Restoration
The first issue is the existence and state of the original. Here, the original is neither absent nor far away. The original and its reflection, reality and its image are physically tied together. The image is never an unsubstantial product or a product of abstraction. As a result, the probability of the crucial dilemma of camera photography based on the physical separation of the subject and the image, such as fake, trickery, or disguise, approaches ‘zero.’ Truth and reality are guaranteed in this way. It is why this world is so unique and novel in terms of media theory. In addition, each reality has only one image: a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reality and image, which leads to the impossibility of reproduction. At this point, Changwon Lee’s work decisively departs in nature from later digital media, let alone photography.
The original exists just below its reflection in such a fragile way that it disappears when the wind often blows. To be precise, even that is a representational image of reality. Reality is physically represented, and then the representation and its represented image are mediated immaterially. Most importantly, reality, the medium, and the image are neither antagonistic to one another nor betray one another. Their relationship is not Oedipal at all. There is no patricide, revenge, or fear here. It is an imit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between the Creator and His creation, that is, a relationship of love.
An Aesthetics of Low-Resolution Image
The second issue is the low-resolution of the reflection. The resolution of the reflection can vary slightly depending on the angle or intensity of the light. The reflection immaterially represents the original, but the details and specificity are inevitably omitted. It is an unavoidable reduction due to the law of entropy of reality-image. It causes the original’s resolution to be greatly reduced, but a visual inference about the original is sufficiently possible. One can even approach and directly confirm it. This reduction in resolution can be interpreted as a symbolic metaphor for the gradual evaporation of divinity or the exhaustion of the sublime, which appears in the transition from divinity to humanity, from humanity to inhumanity, such as to beasts or artificial intelligence.
This era is based on the separation of reality and image and the infinite reproduction of images. It is the era of simulacre, as Jean Baudrillard called it. It is an era where false signs and pseudo-reality go rampant, where images not only conceal the absence of reality but also suppress it. For this, as far as images are concerned, high-resolution, a technology that conceals or surpasses reality, is considered good, while low-resolution is cursed as an unacceptable evil. The high-resolution of image is the extinction value of reality.
On the other hand, Lee insists on blurry reflection. In terms of media, a resolution that surpasses or rivals the original is physically impossible. Is it an error? No. It is a decent sign of not desiring simulacra. It is a visual sign of not vying for the place of reality and not being reduced to the Oedipal complex. Instead, low-resolution is a guide to the essence of beauty. It is a condemnation of the arrogant reason that cannot stand blurriness and enjoys defining. Think of Mark Rothko or Gerhard Richter, for example, to see how much the postmodern discourse, including deconstructionism, has struggled to escape from the shackles of this rational perspective since World War Ⅱ.
According to Jordan B. Peterson, a clinical psychologist at the University of Toronto in Canada, humans are ‘gods created in low-resolution, that is, gods without divinity.” Low-resolution is a visual and metaphorical translation of the lack of divinity. The visual low-resolution becomes a gateway to the reflection and recovery of existence suffering from the absence of divinity, the liberation from the yoke of cursed individuality, and the desire for cosmic universality and solidarity. French thinker Simone Weil defines beauty as the cosmic universality itself or its essential characteristics.
A Fusion of Fact, Representation, and Reflection
Lee’s reflection is connected with the original, and the original is connected with historical moments through reproductive links. History loses concreteness and visual resolution but gains interpretive openness and artistic imagination in compensation. This double spiral structure of loss and recovery is the decisive factor that secures the beauty of this world. Here are some examples:
Case 1. A Day in Namsan (2009).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many statues were erected under the dictatorial government. A Day in Namsan shows a scene where the statues of Baekbeom Kim Gu and Ahn Jung-geun stand. They are silhouettes as reflections of the originals made of coffee grounds. Although both are figures symbolizing the liberation and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sculptor of their statues is known for his pro-Japanese activities. For this reason, the two statues were once involved in the controversy over their removal. The memories of the two independence activists and the distortion of those memories lie upon each other. In the place where the concreteness of the figures is missing, only the dim outline of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flattened gray memories remain.
Case 2. Angel of the Mirror (2014). In 2013, the art collection of the Chun Doo-hwan family was put up for auction. The news is constantly talking about the family’s high standards for art. Is ‘aesthetic standards’ really a concept with substance? Is it okay for the concept to include some oppressive tendencies that led to the Gwangju massacre? Is it structurally related to dictatorship? Is it enough to just say everything differs with the circumstances? Lee takes inspiration from one of the Chun family’s collections, which features an angel holding a jewel-decorated mirror, and arranges for the mirror to reflect the memory of Gwangju. When we say someone has high standards, how many groundless hypotheses, leaps of logic, arbitrariness or exaggeration, and mean flatteries are frequently mixed in it!
Case 3. Shadow Casters (2014). It deals with misgivings about seeing or vision. When viewed from the front, it undoubtedly appears to be a formal application or extension of Piet Mondrian’s neoplasticism painting, a reinterpreted version with light. Neoplasticism was an attempt at ‘spiritual art that can communicate with the universal truth within existence.’ However, the reality of this splendid light-painting is a set of mass-produced, colorful plastic products. Our vision is vulnerable to lies.
Fusion, Lee’s Aesthetic Recipe
Lee comprehensively restores things that the origins of 20th-century Western aesthetics, such as the readymades of Marcel Duchamp, aimed to abolish. Look. There is a coexistence of reality, light, and image; images are neither the product of unsubstantial fantasy nor simulacra. There is an understanding of media that transcends all ages, and the spirit of fact and aesthetics of representation are still alive and well. It is a progressive restoration of aesthetics or the myth of readymade, which denied everything other than the artist’s choice, and even that choice was arbitrary. Physical labor and technology are revived, and even the memories of the community that had been banished by minimalism are summoned.
Things that 20th-century Western aesthetics had put aside coexist without conflict and enjoy equal opportunities for expression. In Changwon Lee’s analog world, we encounter the recipe for bibimbap that Nam June Paik once discussed and the rise of aesthetics that fuse and emb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