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현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 월간미술 2015.01

2014년 갤러리 시몬에서 개인전 <그림자의 주인>을 열면서 신혜영 선생님과 만나 긴 시간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내 작업에 대한 평론글을 써주셨고 아래는 당시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이 대담은 월간미술에 <예술, 현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1>이라는 제목으로 지면에 실렸다.


신혜영(이하 ‘신’) 작가님 작업은 2007년에 열린 두아트갤러리 개인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어요. 지난 6월 고양스튜디오 매칭프로그램에서 처음 뵙고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벽면에 작업에 관한 메모가 굉장히 많이 붙어 있어서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냥 봐도 성실하신 분 같은데 평소 많은 생각을 하시고 그 생각을 거르고 다듬어서 작업하시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죠. 

이창원(이하 ‘이’) 저는 저 자신이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생각을 메모로 많이 남기는 편이에요. 그리고 관심사도 종교부터 다방면에 걸쳐있어 잡식성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사람은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나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요즘은 드라마 <내 생애 봄날>을 보신다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찾아봤는데 엄청나게 울었죠. 뻔한 내용이긴 한데 감동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보편적인 주제를 특별하게 풀어내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어요. 원래 평범한 이야기인데 어떤 관점,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 어떻게 펼쳐놓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공감을 주는 작업이 되잖아요. 그 드라마는 끝까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감동을 주는 면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작가님의 작업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고 봐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평범한 나 자신을 조감도처럼 바라보는 거죠. 그게 작가의 시선인 것 같아요.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그걸 반복하는 것이 작가의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해요. 

작업에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빛과 그림자 등 이원론적 구분에 대해 얘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큰 주제를 다루시잖아요. 동시에 구체적인 사건, 일상의 재료를 가지고 작업하시는 데 커다란 주제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관심사는 1998년 독일에 유학을 가서 저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점차 내 주변의 상황,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어요. 그리고 제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원래부터 알고 작업으로 풀어낸 것은 아니지만 제 작업에 대해 글을 쓰시는 분들이 종종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언급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봤어요. 동굴에서 사슬에 묶여 평생 앞만 보는 죄수들 뒤로 모닥불이 있는데, 그들은 그림자라는 환영을 실체라고 착각하며 그림자라는 현상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죠. 현상의 근원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곧 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근데 동굴 비유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세계상인 것 같아요. 세계상은 세상에 대해 상상한 이미지인데 과거에는 종교에 따른 세계상이 있었고 어떤 시대에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잖아요. 세계상은 상상일 뿐이지만 굉장히 무서운 것일 수 있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상상하는지 자꾸 드러내고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 없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세계상을 가지고 살다 보면 역사적으로 볼 때 위험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의무감이나 사명감이라기보다 그런 상상이 제 작업의 동력인 것 같아요.

저도 작가님의 작업이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왜냐하면, 동굴 비유가 사람들을 묶어놓고 리얼리티는 못 보게 하고 이미지만 보게 해서 이미지가 리얼리티라고 믿게 하는 거잖아요. 반면 작가님의 작업 방식은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대결구도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특히 <평행세계(Parallel World)> 같은 경우에는 더욱 명확하게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공존과 대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처음에 그림자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하는데 실제로 그것의 출처는 전쟁이나 재난에 대한 신문기사나 영상이죠. 현실의 장면이라 리얼리티 같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라는 것도 결국 이미지이고요. 리얼리티가 이면에 가려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중층적인 관계로서 보여주는 것이 현재 작업까지 일관성 있게 보이는 흐름인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작업이라는 것이 관객이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 일종의 장치라고 상상해요. 저자신이 보통사람인 것처럼 저는 보통사람들이 제 작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굉장히 궁금해요. 과거 세계상 속에서는 삶도 생각도 단순했지만, 지금은 서로 이율배반적인 세계상이 공존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보통사람으로서 일종의 분열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동굴의 비유처럼 현상의 근원을 가린다면 사람들은 현상의 실체는 보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그것을 가리지 않으면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에도 그런 관계를 볼 수 있게 장치를 만드는 편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죠. 

이번 전시에서 1층에 설치된 작업 <성스러운 빛(Holy Light)>은 앞에서 봤을 때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지만, 뒷면을 보면 세속적인 삶을 이루는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종교와 일상, 삶과 예술 등 전반적으로 플라톤의 이분법적 구분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인 것 같아요. 독일에서 처음 선보이신 거죠?

네. 그동안 한국에서는 발표한 적 없어요. 전시장에서 맨 왼쪽에 설치된 작품이 2005년 독일에서 발표했던 작품인데 일부 다시 제작한 거고요. 그 작품에서 파생된 작업이 1층에 배치되어 있어요. 

군복무시절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한 경험이 있다고요?

네. 스테인드글라스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만 조율해서 공간 자체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꿔버리잖아요. 그 경험이 굉장히 인상 깊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성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죠. 하지만 그게 사람이 만든 빛이잖아요. 그 빛을 통해 신을 느끼는 것에 대해 질문도 하게 됐어요. 

그런 불경한 생각에서 시작된 거군요.(웃음) 사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빛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그때부터 빛에 대한 관심을 가지신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제대하고 바로 빛에 관한 작업을 한 건 아니에요. 미대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돌, 용접 등 전통적인 작업 방식을 배웠죠. 이후 독일에 가서 사진이나 음식물 등 좀 더 다양한 매체를 가지고 실험을 많이 했어요. 

독일에 유학 가신 것이 큰 전환점인 것 같아요. 조각은 실제 공간의 부피를 차지하고 물질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인데, 이후 작업들은 비정형적이고, 물질이 아닌 것일 수도 있고, 빛을 이용해 그림자가 공간을 점유한다거나 반사된 이미지를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조각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작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2003년 블라인드 형태의 구조에 찻잎을 뿌려서 형태를 만들면서부터였어요. 블라인드와 블라인드 사이에 재료가 반사되는 빛을 어슴푸레 발견을 한 거죠. 그때부터 빛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물질을 버리고 빛으로 작업했다기보다 그 빛이 여전히 물질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거죠. 사람들로 하여금 반사된 빛을 보게 하지만 그 빛이 원래의 물질을 지시하기 때문에 물질을 너머선 재료를 가지고 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거에요.

작업의 재료가 찻잎처럼 대부분 일상의 하찮은 재료인데 만들어낸 이미지는 주로 영웅이나 신화 같은 것이더라구요. 그런 대비가 무척 흥미로워요. 어떤 의도인가요? 

영웅을 형상화한 동상과 같은 것들은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세월의 풍파에 잘 견디는 단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그 동상의 주인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 바뀌면 금방 철거가 되거나 철거 논란에 휩싸이게 되죠. 눈앞에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지만 사실은 연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어떤 거리에서는 굉장히 웅장한 크기의 동상의 이미지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후’하고 불기만 해도 흩어지는 재료로 만드어진거죠. 게다가 찻잎을 가까이서 보면 낙엽처럼 보여요. 그런 시간성도 있고 동양적이고 명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죠.  

왜곡된 진실을 드러내다

반사된 빛을 다룬 작업 중에서 일시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형태로 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업이 찻잎 작업인 거 같아요. 그리고 그다음이 거울반사 작업이죠? 

네. 제가 독일에서 있을 때 한국에서는 찻잎을 이용한 스케일 큰 설치작업을 많이 선보였고요. 유럽에서는 리플랙션으로 이루어진 사진, 그림 작업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2008년까지 독일과 벨기에 갤러리와 일을 하면서 작품도 잘 팔리고 생계에도 큰 보탬이 됐죠. 그런데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거에요. 그래서 2009년 한 전시를 앞두고 뭔가 새로운 것을 모색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유리판에 그림을 그려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를 이용한 자화상 작업을 시도했어죠. 나는 하나지만 여러 공간에 비춰 어떤 상황에 투영됐나에 따라 내가 다르게 보이는 그런 작업이에요. 사실 드로잉 북을 보면 2004년부터 거울을 이용한 작업을 구상했는데 그동안 실현을 안 한 거죠. 

자화상 작업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이에요. 작가가 그린 것은 유리에 네거티브 형상인데 빛에 비쳐서 그림자로 보일 때 비로소 포지티브로 보이잖아요. 그런 방식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플라스틱해(The Plastic Ocean)>에도 연결돼요. 세계지도를 그릴 때 작가가 플라스틱 조각으로 표시해놓은 곳은 바다를 이루는데 우리의 눈에는 대륙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에 바다가 보이죠. 그래서 오리-토끼 그림처럼 대륙인지 바다인지, 플라스틱 조각이 어떻게 놓이고 얼마나 조밀하게 모이느냐에 따라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세계지도에서 공룡과 같은 다른 형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관계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도록에도 <플라스틱해>에 관해 짧은 글을 썼는데 우리가 세계를 파악할 때 육지를 실제 공간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빈 공간에 쓰레기가 그렇게 많이 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반전시켜 본 작업이에요. 

그럼 <엔젤 오브 더 미러(Angel of the Mirror)>는 어떤 작업인가요? 

2013년 겨울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소장품이 옥션에 나왔다는 기사가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어요. 기사들을 봤더니 온통 그 일가의 안목이 높았다든지 어떤 작품이 얼마에 낙찰되었다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더군요. 그때 작가로서 예술이 과연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예술이 권력과 부의 장식에 불과한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하게 된 작품인데요. 소장품 중에서 하얀 천사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거울을 들고 있는 공예품이 있었어요. 그 작품이 소장품이 얼마에 낙찰됐다는 기사의 대표 이미지로 쓰였는데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죠. 일가 사람들이 이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을 때 저 거울은 무엇을 비추고 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한 거죠.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왕비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었을 때 자신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저 거울도 광주라는 도시를 계속 비춰주는 내용으로 구성하게 된 거죠. 거울은 제가 인터넷에서 구매한 거예요.  

2층 전시는 두 개의 다른 작업이지만 <네 개의 도시(Four Cities>는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 각기 다른 이슈를 가지고 있는 도시를 모아서 4개의 도시가 하나의 실루엣을 이루잖아요. <엔젤 오브 더 미러>는 광주를 비춰주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역사․정치․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같이 어우러져서 전시공간을 하나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문을 통해서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방사능이 유출됐다는 식의 사건을 접하잖아요. 미디어가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나랑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거리를 느끼거든요. <네 개의 도시>는 우리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고 있는데 다른 세 개의 도시를 걸어서 몇 시간 가면 아니 버스를 타고 몇 분만 가면 갈 수 있는 곳처럼 환영의 차원에서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이의 단절은 왜 생기는 것인지 그런 생각에 하나의 도시처럼 연결해 본 거에요. 

요즘에는 실질적인 거리 개념은 무너졌고 심리적인 거리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상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거죠. 미디어로 전쟁을 봤을 때도 실제 전쟁의 참혹한 감정은 잘 느낄 수 없죠. 미디어 환경이 리얼리티를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아요.

세상은 점점 이미지로만 드러나고 리얼리티는 숨겨지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요. 뉴스도 현상만 있고 진실은 가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장치를 만드신다는 말씀이 와 닿네요. 전반적인 작업이 영구적인 조각이 아니라 판매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지점에 대해 어떻게 고민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한국 미술계는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와 비평 위주의 작가 이렇게 양극화가 심한 것 같아요. 물론 서양 역시 나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이렇게 심하진 않거든요. 설치작가도 작품을 판매하고 미술관에서는 커미션 작업을 통해 응용할 수 있거든요. 제가 독일에서 배웠던 벨기에 교수님도 그런 부분을 항상 같이 이야기하는 상담파트너였어요. 그런데 한국은 개인 소장가들이 일반적으로 작품을 투자라든지 장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투자나 장식이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거든요. 작가가 성장하면 그 작업도 같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투자일 수 있고 장식적으로 집이나 공간에 맞게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건데 교육의 문제라고 할까요. 전체적인 생각의 문제라 한국에선 참 요원한 일이죠. 

저는 한국 사람들의 취미활동이 굉장히 섬세하고 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디오, 기계식 컴퓨터 자판, 만년필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세세한 것을 따지고 그 차이를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아직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파고들려고 하지 않고 무관심하거나 잘 모른다는 게 좀 신기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이 관객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서양 작가의 아티스트 토크하는 걸 봤는데 계속 관객의 입장이라든지 중산층이 미술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컬렉터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 작가들이 작품을 판매되도록 잘 마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외국에서는 작품을 잘 판매하는 작가들의 경우 작품 지시서(instruction)이나 패키지가 완벽하죠. 아직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완성품으로서 마감처리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갤러리 있을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큐레이터, 비평가, 기자 등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전반적으로 상승해야 해요. 

네. 복합적인 문제죠 

앞으로의 계획은요? 

중국 베이징 코뮨이라는 곳에서 서진석, 이진명 큐레이터가 기획한 한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그룹전 <GATE-OPENER>(2014.11.25.~2.28)에 참여하구요. 연말에는 재충전해야죠. 


이창원은 1972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벨기에 갤러리 쿠세너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1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독일, 영국, 중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6년 독일대학교 외국인학생상(DAAD)을 수상했다. 

신혜영은 1975년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했으며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월간미술, 가인갤러리에서 재직한 바 있다. 


  1. 월간미술 2015.1월호, pp.134-141, 진행정리· 이슬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