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이미지의 재/탄생-‘평행 세계’를 구축하는 이창원의 미술

강수미 (미학, 예술비평, 동덕여대 교수)

영화관, 거울의 집, 그림자연극 무대, 쇼윈도, 천문대, 그리고 각종 기념물과 축제.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단어만 들어도 충분히 지겹고 상투적인 ‘일상’과는 차별화된 공간이다. 즉 이것들은 항상 이미 ‘생활’과 ‘실용성’과 ‘평범함’을 벗어나 특별하고 재미있으며, 신기하면서 매혹적이다. 또한 크고 작은 기술 개발이나, 소박하든 대단하든 주어진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찬란하고 스펙터클하게 사람들을 자극하는 사건/사물/사태의 집합소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의미심장한 공통 속성은 이것들이, 즉 그 공간 또는 사건의 장(場)이 모두 이미지들의 거주 공간이며, 동시에 그 이미지들이 한결같이 한시적이라는 점이다. 거기서는 영원불멸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순간들만이 산다. 그 곳의 이미지는 길어봐야 상영/상연시간만큼만 존재 가능하며 혹은 표면이 빛을 받는 순간만 떠올랐다 이내 흩어진다. 조명이 꺼지면 같이 사라지고, 시시때때로 바뀌며, 매시간 매초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명멸한다.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논할 작가 이창원의 작품들을 보면 위와 같은 생각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물론 이때의 생각이란 작품이 담고 있는 비판적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원이 아니며, 그렇다고 우리가 작품을 도구로 삼아 그런 공간들에 대한 문화비평적 담론을 전개하는 차원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장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창원의 여러 작품들이 지반으로 삼고 있는 질료와 주제, 표현 형식 및 기교, 작가가 조성한 작품의 환경과 그 효과, 그리고 그 작품들에 대해 감상자가 경험할 지각에 입각해 드는 생각이다. 요컨대 이창원의 미술은, 그림자연극이나 마술 환등상의 무대처럼 빛과 현실의 물질들을 가지고 만들어낸 일시적 일루전의 세계이며, 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사건의 순간이고, 특별한 조형 형식과 미적 테크닉을 구사해서 확보한 감상자 중심의 미적 경험이라는 말이다.

다른 관계의 이미지 

   이창원은 1998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2000년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로 유학을 간 이후 11년 동안 그곳에서 학업과 작가 활동을 하다가 최근 귀국했다. 우리가 이러한 작가의 이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창원의 작업이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의 수렴(convergence)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표면과 입체적 구조가 병렬-연동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더 이상 장르를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가 애초 어느 분야에서 예술적 역량을 훈련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작품 이해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창원이 조소를 전공한 이력은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건대, 질료를 적절하게 채택 및 변용하고 공간을 다차원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동시에 그가 독일에서 장르의 경계를 넘어 통합적으로 현대미술의 다양한 국면들을 학습한 시간은, 미술을 기존 조형예술의 문법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원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데 결정적인 조건이 됐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런 조건 속에서 형성된 이창원의 현재까지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이창원의 작업 영역과 그 작품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도 동기(leitmotif)는 ‘이미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 이미지는 작품의 시각적 결과 혹은 감상자가 보는 입장에서 예술작품 일반의 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시각예술작품의 오랜 역사 동안 실험과 관례화를 이어가면서 형성된 조형성에 대한 해체이자 절합(articulation)의 성격을 갖는 ‘메타 주제로서의 이미지’다. 이창원의 미술에서 이미지는 가령 그의 작품 중에서 화분에 물을 주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있다고 할 때, 그 실루엣이 보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작가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한 감상자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시각예술에서 ‘표현의 방법론’을 지시하며, 다른 한편으로 작품으로 ‘표현된 것의 수용’을 지시한다. 

   세부 사항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창원이 2002년경부터 현재까지 가장 많이 실행한 작품은 일종의 ‘블라인드 형태의 무엇’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라는 매우 모호한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작품 군(群)은 그림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며, 설치도 아닌 동시에 그 모든 장르적 속성의 수렴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가 좀 더 명확할 것이다. <A Day in Namsan>은 500×400cm의 대형 크기로 벽에 걸리는 작품이다. 그런데 언뜻 2차원 타블로 회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일정한 두께와 너비의 흰색 막대를 균일한 간격으로 블라인드처럼 늘어세워 화면을 입체적으로 분할하고, 그 막대의 매 칸 윗면마다 커피가루를 얹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무작위적으로 커피를 뿌려놓은 것은 아니다. 작가는 치밀한 예상 하에, 멀리서 보면 막대 위에 쌓인 커피가루의 궤적과 그 갈색 덩어리가 쌓인 각 판면들이 인접한 면들에 반영되면서 만들어내는 음영 효과를 서울 남산에 가면 마주치게 되는 김구동상과 그 주변의 경치에 유사해보이도록 구축했다. 우리는 여기서 최종적으로는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새가 날아다니고 동상이 서 있는― 하나의 2차원 풍경을 본다. 하지만 그것은 평평한 캔버스의 표면 위가 아니라 부조/반(半)입체 구조 속에서 구현됐으며, 그림 속 밝음과 어둠의 형상은 화가의 붓질에 의해서 화면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작품이 설치된 현재시간과 공간의 빛, 커피 입자, 흰색 막대들 간 상호 작용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현상된 것이다. 

   이는 회화와 조각의 관례적 표현 조건을 각 요소의 층위에서 교차시키거나 재편성해서 얻은 제3의 결과이며, 결과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이미지의 형성과 수용 과정에 창작의 개념적 포커스를 맞춘 설치물이다. 관객의 시선은 거기서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작품에 내재된 고정된 미가 아니라 순간순간 떠올랐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일시적인 미를 즐길 것이다. 그 ‘일시적인 미의 유희’는 이제 더 이상 현대미술에서 낯설지도 않고, 영원한 미에 대한 관조 혹은 침잠에 비해 하위적인 감상으로 평가 절하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미술이 대중문화와 근친하는 만큼이나 우선할 소양이 되었다. 그 점에서 이창원의 작품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작가의 경우, 감상자의 순간적이고 즉자적인 미적 경험만큼이나 작품의 존재 방식을 순간적이고 즉자적인 상태로 열어놓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즉 그의 작품 또한 소장 가능한 미적 오브제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축되고 해체되기를 거듭한다. 그럼으로써 이창원의 블라인드 회화-조각-설치작품은 메타 층위에서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거울, 빛의 비판적 환등상

   2010년부터 이창원은 <Parallel World>라는 제목 아래,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작업의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이 작업은 광학 렌즈 형태의 프로젝터가 나오기 전 교육용으로 널리 활용됐던 유리 환등기와 매우 유사하다. 유리 환등기는 광원이 부착된 유리판 위에 투명 필름으로 전사한 그림이나 사진을 올려놓고, 거울 반사각을 거기에 맞추면 어두운 벽 위로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는 구조의 시각장치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창원은 사진이미지를 벽에 프로젝션 해서 감상자가 어두운 방에서 밝은 시각적 환영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우선 작가는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재난’이나 ‘전쟁’ 같은 주제에 포함될 수 있는 사진들을 찾아내 인화하고, 그 사진 중 특정 부분을 섬세하게 오려낸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돌진하는 비행기의 형체만 오려내는 식이다. 그렇게 일종의 공판화처럼 변한 사진이미지를 거울에 부착하고 그 위에 빛을 비추면 이미지가 비어있는 부분(즉 거울 면)만 반사가 되어 벽에 그 오려내진 형상이 밝게 맺힌다. 이를 이창원은 어두운 방 전체를 써서 설치작품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그것이 <Parallel World>인 것이다. 작품 제목이 이미 지시하고 있듯이, 여기서 작가의 가장 큰 의도는 ‘평행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세계는 폭력과 고통이 일상이 돼버린 우리 현실과, 그 현실이 각종 미디어의 중개를 거쳐 재정의 ․ 재 형상화되는 이미지의 장일 수 있다. 또는 미디어를 통해 가공된 공적-실제적 이미지의 세계와, 작가 이창원이 그런 이미지들에 개입해서 예술적으로 구조와 디테일을 변경시킨 이미지의 세계다. 플라톤 이래 전통 철학의 인식론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구조 안에서조차 고루해진 실재 vs. 가상, 현실 vs. 환영이라는 이분법의 구조, 혹은 이원론적 세계관이 이창원의 <Parallel World>에서 반복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기 동안 줄기차게 비판받았고, 논리적으로든 현실 사회 속에서든 차별적이며 불합리하다고 공박 당했던 그 이분법 말이다. 혹은 ‘분리’와 ‘차별’과 ‘경계’ 대신 ‘융합’과 ‘차이’와 ‘사이’라는 새로운 긍정적 가치가 들어서면서 악평에 시달렸던 그 이분법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창원은 이 이분법의 구조를 기만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더욱 극명하게 실재와 가상, 현실과 환영을 병치시켜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존재의 간극을 드러내는 식으로 두 세계를 만들어냈다. 

   전시가 이뤄지는 어두운 방에 들어서면 사면을 빙 둘러서 LED 조명이 달린 테이블이 사람 앉은 키 높이로 놓여있고 그 위에는 앞서 설명한 사진이미지-거울이 놓여있다. 그리고 네 벽면의 넓은 공간에는 마치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유영하는 것처럼, 혹은 밤하늘의 파노라마처럼 다종다양한 형상들이 펼쳐져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투사되고 있다. 상당히 섬세하게 그린 목탄 소묘 같은 질감의 그 영상은, 물론 그 아래 테이블에 놓인 사진의 거울 부분이 빛을 반사해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자의 영상과 후자의 사진이미지를 전혀 다르게 경험하게 된다. 이는 양자가 물리적 인과관계(사진이미지-거울이 없고, LED 빛이 거기에 비치지 않는다면, 벽의 이미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있더라도, 그 이미지의 생산과 시공간에서의 실제 작용면에서 완전히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의 사진은 여러 매스미디어가 특정 상황에 포커스를 맞춰서 절단하고 틀을 지워 생산한 재난과 폭력의 현장 이미지다. 그리고 벽에 투사된 영상은 그런 현실의 이미지를 작가가 다시 발췌한 후 거울과 빛의 반사작용을 이용해 재/탄생시킨 거대한 환등상(Phantasmagoria)이다. 그것이 현실이미지를 원천으로 한 환영이라는 점에서 재탄생이라면, 동시에 그것은 현실에서 파생된 이미지의 부분들을 부재(오려내기)시켜 만들어낸 지금 여기의 실제 현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탄생인 것이다. 

   이렇게 이창원은 두 세계를 긴장 관계로, 그러나 상호 내포인 동시에 병존하는 관계로 제시해서 감상자가 무엇을 경험하거나 얻게 하는가? 첫 번째 답은 작가가 내용적 측면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내러티브를 가진 이미지를 선별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테러와 전쟁이 일상이 된 동시대 삶의 현황에 대한 이미지적 각성을 관객에게 기대한 것일 수 있다. 다음, 이창원은 감상자가 일견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것처럼 현실을 중개하는 미디어의 진면모를 자신의 설치작품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재고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방법을 단지 자신이 현실에서 차용한 매스미디어 이미지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보다 더 판타스틱하고 스펙터클한 성격이 증대된 거울-반사이미지를 구현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각자 스스로 평행하는 두 이미지 세계의 실체와 작용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끄는 식으로 말이다. 

일류미네이션의 가능성들

   이창원의 작품에서 필수적 요소는 빛이다. 물론 모든 시각예술작품이 오직 가시성의 빛 아래서만 지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빛은 시각예술의 당연한 요소다. 하지만 이창원의 경우 빛은 그보다 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근본 조건을 이룬다. 앞의 논의에서 다뤘듯이 그의 작품은 빛의 반영효과와 물질의 있음이 결합해서 구축된 것이기 때문이고, 거울이 빛을 반사하는 물리적 속성을 극대화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창원의 작품 중에는 거울 위에 유리용 유성 페인트를 사용해 부처의 네거티브 초상을 그리고, 그것을 야외의 자연광 아래 비춰 반대편 그늘에 포지티브 이미지가 맺히도록 한 것도 있다. 또 비슷한 방식으로 1960년대 정치적으로 조작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얼굴을 유리판에 그린 것도 있는데, 여기서도 빛은 네거티브-포지티브 이미지의 구현에 핵심적으로 기능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작품이 모두 만약 빛이 없다면 ―그것이 자연광이든 LED 전등 빛이든 간에― 가능하지 않은 이미지의 세계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 빛은 존재의 진리이자 진리의 드러냄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가 “빛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가리키는 광선이라든가 길을 인도하는 횃불이라든가 다가오는 암흑의 퇴장”1이라고 말할 때, 그 은유에 담긴 뜻이 모두 빛이란 진리의 길잡이이자 어둠/암흑이라는 무지와 몽매의 물리침을 가리킨다. 굳이 철학을 인용했지만, 우리의 통상적 사고 속에서도 여전히 빛과 어둠은 이항대립하고, 전자는 후자의 부정, 기만, 비진리를 밀어내는 역할로 자리매김해 있다. 영어의 ‘illumination’이 ‘조명’ 및 ‘계몽’이라는 뜻을 동시에 내포하며 인식론적 용어로 널리 쓰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창원의 작품들을 다시 보자. 그러면 빛이 필수 요소로 채택되는 그의 작품들은 그 의미상 어둠에 대한 극복으로서 조명이자 비진리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계몽일 수 있다. 이를테면 앞서 우리가 해석했듯이, 그의 <Parallel World>는 매스미디어의 가상적 효과가 만연한 지금 여기 현실에 대한 예술 비판적 ‘비춤(계몽)’으로서 이미지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반대 면도 간과할 수 없다. 즉 어둠이 빛의 반대 면이듯이, 비진리가 진리의 이면이듯이, 예술 비판적 계몽의 이미지가 동전의 양면처럼 환영/환등상과 등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창원의 블라인드 형태 작품은 확고하고 구체적인 상이 아니라, 실제 사물이나 풍경을 가변성을 지닌 재료(전시장의 빛과 커피/파슬리/찻잎 등의 입자)로 그림자처럼 묘사한 상이다. <Parallel World> 또한 기존에 미디어를 통해 공적으로 유포된 사진들을 ―그것이 진실이든 그렇지 않든― 작가가 다시 한 번 가공해서 스펙터클한 공간의 이미지로 변환시킨 이미지다. 그 점에서 이창원이 구현한 작품의 이미지들은 불완전하고, 가변적이며, 인위적이다. 조형적 완성도나 시각적 만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이 감상자의 의식에 작용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연말 루미나리에 축제를 위해 청계천 일대에 설치된 휘황한 조명장식에 감탄하고 그것을 즐기는 데 몰입하듯이, 이창원의 빛 이미지 작품 앞에서 우리는 감탄할 것이고 즐길 것이지만, 현실과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는 그 양립하는 세계의 긴장, 그리고 이미지가 생산-재생산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변형을 감상자가 자신의 작품에서 지각하기를 기대한다고 해도, 감상의 양상은 앞서와 같이 흘러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너무 앞질러 걱정하지는 말 일이다. 여전히 우리는 의식적인 차원의 문제를 걱정하고 있지만, 순간순간 감각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특별한 지각과 깨달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던은 감각들에 대항한 조직적인 불신이었다. 오늘날 다시 그 감각들을 신뢰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심층 없는 표면이다.” 한 매체 미학자의 이와 같은 주장이 유효하다면, 우리는 한시적 빛을 통해 이미지의 양면을 공존시키는 이창원의 미술에 여전히 기대를 걸만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지목하자면, 그의 작품들이 실제의 시공간에서 감상자 각자의 지각과 의식에 작용하는 무수히 많은 개별적 가능성에.


  1. Hans Blumenberg, “Licht als Metapher der Warheit: Im Vorfeld der philosophischen Begriffsbildung,” 정성철 ․ 백문임 역, 『모더니티와 시각의 헤게모니』, 서울: 시각과 언어, 2004, pp. 54-55.